세월의 자취, 그 재생의 忍苦 - 박철의 한지 작업, 서성록 (미술평론가) (1993년)

박철 0 5,802

박철은 경북 점촌 태생이다. 안동과 멀지 않은 지역이고, 임화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과도 인접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근처에 위치하므로 그 곳 지리에 대해서는 토박이만큼은 못되나 밝은 편이라 할 수 있는데, 박철의 작업이 안동 지역의 임화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필자가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동댐 완료와 더불어 임화댐 공사가 시작되자 그곳의 거주민들은 오랜 세월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거기에는 폐가만 볼썽사납게 남겨지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남다른 애착을 가져왔던 박철이 임화댐 수몰지역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온갖 집기, 농기구를 건져내기 위해서였지만, 드나드는 빈도가 높아 질수록 그는 그 곳에 대해 또 다른 애착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을 작품화 하는 데로까지 발전시켰다. 거기서 얻어진 것들이 그의 작품에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하는 고가의 각종 문짝들, 부서진 와당, 허물어진 기와조각들과 말안장, 멍석, 여물통, 독과 단지 등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수몰지역이 그에게 얼마나 큰 느낌의 무게를 지니며 다가왔는지 눈을 감고도 짐작 할 수 있다. 수몰지역을 이리저리 왕래하다가 그의 시선에 우연히 들어온 것이 문짝이었는데, 그 문짝의 이미지에 착안하여 이를 작품화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문짝은 이미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듯 문짝이나 그 위에 간신히 달라붙은 창호지는 상처투성이의 볼품없는 몰골을 하고 있다. 주인을 잃어버린 실제의 폐가 또한 이처럼 사연이 깃들어 있으며, 또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밀려오는 문명 속에 떠밀려가는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의 느낌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이미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텅 비어 있는 폐허의 고가와, 영겁의 서글픈 얼굴을 부끄럽게 드러내버린 창문에서 오는 고독감과 오랜 시간의 연속성을 이제 그 단절의 현실 앞에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허무의 무상함을 느낀다.” 수몰현장에 드나들며 시작된 그의 작업은 단순한 향토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문명이란 미명화에 침수해버린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점차 퇴색해가는 우리의 전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폐허의 고가에서 단절의 현실을 실감했던 때의 생각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임화댐 건설로 상징되는 문명의 쇄도는 이처럼 삶의 거처를 박탈하고 우리의 삶을 전혀 예상치 못한 세상으로 떠밀어낸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면에는 농촌마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 들이 곧잘 등장한다. 넓게 보아 그것들은 고향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잔상으로 풀이되지만 토속적 실물들의 의미를 짚어주고 이를 조형적인 맥락에서 의미 있게 해결해가는 것은 그의 작업과정을 살펴볼 때 좀 더 분명해진다.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은 국적 있는 그림이며, 이것은 그가 작업과정에 있어 외래에서 흘러들어온 것에 편승하기 보다는 독특한 성형절차, 서양식 복제술에 의존하기 보다는 전래되어온 탁본에 의존하고, 한지를 선택하며, 또 그것의 미묘한 색감을 살려내는 데서 각각 들어난다.

그의 작품표면은 요철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것은 실물을 석고나 시멘트로 눌러 형태의 음각을 만들고 이것이 완전히 굳어질 때를 기다려 한지의 원료인 닥종이를 그 위에 붙이는 과정을 거쳐 성형된 것이다. 물론 그의 작업이 여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양각으로 틀을 갖춘 이미지 위에 다시금 색 한지와 고서적의 낱장들을 붙여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탁본으로 떠낸 형상 또 그 위에 보태진 색 한지와 고서적의 낱장들, 그리고 30여 겹의 닥종이 배점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것의 표면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겨운 과정을 통해 탄생된 이미지는 단순한 복고 취향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창틀과 창상이 지닌 기하학적 조형미, 멍석의 반복무늬에서 느낄 수 있는 세련된 감각, 그리고 한지 자체가 지니 은은하고 담백한 표정이 살아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한지의 텍스추어는 부조적으로 처리된 창틀 문살 등의 형체와 함께 우리의 문화적, 정신적 숨결과 잇대어지면서 작가의 말대로 우리의 것으로 세계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근래에 와서. 정확히는 91년부터 작가는 또 하나의 시도를 하고 있다. ‘앙상블이란 이름으로 연구되는 그의 시도는 서로 성질이 다른 것을 한 화면에 병치 시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멍석이나 고서 따위와 바이올린, 첼로 및 바이올린의 대비가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해 보이지만, 이러한 대비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근래에 와서 옛 것과 새 것의 조화, 토속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접맥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그의 시각이 어느 국무적인 문제에 한정되기 보다는 한층 보편적인 문제로 확산 되어가고 있음을 실증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을 유난히 빛내주는 것, 그것은 아마도 옛 것의 무조건적 답습이 아니요 옛 것의 참맛을 되살려내되 오늘의 미감에 걸맞게 근사한 수법으로 소화해 내는데 있지 않나 싶다. 또 그에 수반되는 고단한 작업행위를 마다하지 않을 때 에만 그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몸소 심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왜소화되는 전통의 문제를 이처럼 끈질기게 파고들면서 거기에서 하나의 결실을 맺어내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며, 이시대의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성록(미술평론가)

Trace of the Lapse of Time and
Fortitude of Reconstruction
Park,Chul’s Work with Korean Paper

Park Chul was born in Jom-chon of Kyungsang-bukdo,where is not far from An-dong. Nearby there exist submerged districts formed by the construction of Lim-wha Dam. I suppose the fact that his work has much to do with Lim-wha Dam is helpful for my interpretation of his work.

As Lim-wha Dam was constructed, inhabitants there were obliged to leave their hometown and houses were laid waste. Park Chul began to frequent there, for he was attached to our cultural legacy. First he picked up mis-cellaneous household goods and agricultural implements. With the lapse of time, he felt himself more and more attached to that place and finally came to produce works with the motif he found there. We can be assured of the importance of his attachment to those submerged districts for his works, as we see usually on his works doors of old houses, broken tiles of roofs. saddles, straw mats, mangers, jars and pots.

He came across doors of old houses and decided to fi-gure the image of those doors. Doors he found there were severely impaired. They were almost ruined and looked miserable. Houses which were not inhabited loo-ked likewise so desolate and dreary. There he could ea-sily imagine the humble image of our fellow countrymen who were pushed away by advancing waves of civiliza-tion.

Once he noted his impression as follows: ‘I saw the wasted, vacant houses and there also windows which looked so abashed. I felt loneliness and vanity that we were forced to endure in the reality of discontinuity of our tradition."

His works of the submerged districts entail the mea- ning that is not restricted to love of hometown. What we can see there, is in a sense the appearance of ourselves who are being eroded by the power of civilization and at once the image of our tradition that is being faded. In the works produced following his motto, “Pictures must have nationality", we can visualize his consistent effort to animate the breathing of our cultural tradition in a more refined aesthetic form.
 
Recently, since 1991, he has made a new attempt cal-led “Ensemble.” He juxtaposed different kinds of things on one canvas, for example, contrasting straw mats and old books with violin, cello and their bows. The contrast of straw mats with violins may appear unnatural and aw-kward. But in his attempt we can see how strenuously he has been occupied with connecting the old and the new, the folk and the western. In other words, this means that his vision is not limited to the regional prob-lem, but expanded to the more generalized ones.

The special merit of his works lies in that they are not following the old without reservation, but assimilating the old with new methods harmonized with contempo-rary aesthetic sense. He shows himslef that this kind of work is only possible when one face the difficulty with extraordinary fortitude. His strenuous efforts that he has made persistently to get over the problems of tradi-tion throw a ray of hope that is very rare in the present day.

His works of the submerged districts entail the meaning that is not restricted to love of hometown. What we can see there, is in a sense the appearance of ourselves who are being eroded by the power of civilization and at once the image of our tradition that is being faded. In the works produced following his motto, “Pictures must have nationality", we can visualize his consistent effort to animate the brea-thing of our cultural tradition in a more refined aesthetic form.

Recently. since 1991, he has made a new attempt called “Ensemble.” He juxtaposed different kinds of things on one canvas, for example. contrasting strawmats and old books with violin, cello and their bows. The contrast of straw mats with violins may appear unnatural and awkward. But in his attempt we can see how strenuously he has been occupied with connecting the old and the new, the folk and the westren. In other words, this means that his vision is not limited to the regional problem, but apam ded to the more generalized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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