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과 변용, 또는 융합의 시대 : 박 철의 탐색여정과 작품세계 - 김복영 (미술평론가) (1996년)

박철 0 5,489

인사말씀

동은 동, 서는 서, 둘은 결코 만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키프링이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동양과 서양은 키프링의 예상을 뒤엎고 놀랍도록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는 음악, 문학, 미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 동과 서의 융합이 다각도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박 철씨가 지난 10년 이상 추구해 온 것도 이와 같은 동서가 하나가 되는 세계였습니다. 그는 주로 멍석, 닥종이 한지, 고서적의 낱장들을 소재로 하고 여기에 바이올린과 같은 서양악기를 모티브로 깔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토속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서민적인 것과 귀족적인 것과의 대비를 통해 특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가장 개별적인 것, 토착적인 것이 갖는 세계적이며, 현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는 그 자신이 서양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켜 가면서 서구적인 것, 현대적인 것과 융합된 세계를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박 철씨의 전시회를 열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런데 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나갈지 더욱 큰 기대를 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9966

워커힐미술관장 박계희

 

 

차용과 변용, 또는 융합의 시대 : 박 철의 탐색여정과 작품세계

김복영(미술평론가)

 

1

71년 초반부터 시작되는 박철의 화력은 줄잡아 25년여를 헤아린다. 78년에 첫 개인전을 시작해서 어느덧 그 열아홉번째를 맞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탐색에 있어서 적어도 세 개의 에포크를 마크하고 있다. 대체로 제1기는 78년에서 83년에 이르는 초기 개인전 시대라 할 수 있고 그 후 4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89년에서 95년에 이르는 해외전을 위시한 왕성한 도약시대라 할 제2기를 마감했는가 하면, 금년부터 작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자 또한 이를 용인하고자 하는 제3기에 진입하고 있다.

산술적으로 이십 수년을 기록하고 있다든지 탐색과 변모의 시기 또한 세 번의 분수령을 여과했다는 점을 감한 할 때 그의 탐구 여정의 전모를 이 시점에서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나는 그의 탐색 과정을 관류하는 하나의 맥락을 이 글의 표제와 같이 차용과 변용또는 융합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이하에서 그 변모를 순서에 따라 기술해 보고자 한다.

차용과 변용 또는 융합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사하듯이 그는 일찍이 그의 심중이나 주변의 사물들을 직접 그려 보이는 대신 자신의 심의(心意)를 대신할 수 있는 사물들을 종류에 있어서 단수 또는 복수로 찍어 이것들을 융합해서 새로운 이미지로 변용 시키는 일에 몰두해 왔다. 78년의 첫 개인전에서는 먹과 단색의 화선지를, 82년의 개인전에서는 색이 들어간 광목을, 그리고 83년에는 피지(皮紙)를 이용한 탁본 작업을 보여 줌으로써 제1기의 탐색시대를 특징지은 바 있다.

탐색 시대의 경우 그가 어떠한 연유에서 그런한 작업 방식을 택하였는지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먼지가 쌓인 창유리에 물방울이 튀어 씻겨진 모습에서 과거의 연륜과 현실의 순간이 만난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한국일보1983.10.8.)당시 나는 이러한 언급에 대해 해설을 쓰면서 그는 이미지화의 문제를 의식에 두면서 찍기의 방법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82년 개인전 서문)고 기술하였다.

찍기이미지를 말하면서 그 당시 내가 그에게 눈 여겨 두었던 것은 이것들이 앞서 그의 언급에서 나타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는 아주 평범한 아이디어였다. 초기에 그가 만남을 위한 작업에 등장시켰던 것음, , -찍음의 연작들을 중심으로 도입한 찍음과 얼룩, 나비, 오징어 연, 나뭇잎, 문자, 창문 등으로 열거될 수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소재로 하거나 그 위에다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한, 찍음에 의해 이미지들을 중첩시키고자 했다.

3

8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기 계열의 역작을 출품한 이후 4년간에 걸친 휴지기(休止期)를 거쳐 89년에서 91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창틀과 멍석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면서 화면은 중후하고 견실해진 성가를 보이는 변화를 가져 왔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의 전형을 유리창의 빗물의 이미지에서 찾았던 초기를 벗어나 창틀과 멍석에서 만남의 이미지를 시도한 것은 제2기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19859월부터 경북 안동대학 미술과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됨으로써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 왔다. 점촌태생인 나로서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지만 안동지역의 가옥형태가 유난히 한국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더불어 신기하게도 이 순간의 현대 문명 속에서 고가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왔다는 사실에 반가움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던 86년 어느 날 안동 근교의 인하댐 공사가 시작되고 수몰 지구가 생겨나자 주민들은 정들었던 집과 터전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옛것들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키워 왔던 나는 수몰지역에 무참히 버려진 문짝들, 부서진 와당, 허물어진 기와, 농기구, 말안장, 멍석을 수집하는 데 아픔을 갖고 골몰하였다. (미술세계, 1987.7)

어떻게 해서 이즈음 그가 창틀과 멍석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이 글에서 분명해진다. 그것은 현대 문명 속에서 만나기를 기대했거나 그것도 수몰 지역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통해서,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만나야만 했던 시간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미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텅빈 폐허의 고가에서 영겁의 서글픈 얼굴을 부끄럽게 드러낸 창문에서 오는 고독감과 연속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현실 앞에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허무와 무상함이 밀려 왔다. (같은 글)

그는 바로 이러한 순간을 통하여 저며 오는 전율을 토로하기 위해 만남의 영원화를 위한 작업을 보다 더 강화하고 치열성을 갖고 임하게 되었다. 창호, 동창이 밝았느냐의 연작들은 그래서 당시의 감회를 끓어오르는 애정과 열정으로 담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평면적인 유화나 드로잉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보다 강렬한 수단이 필요하였다. 이때부터 조소나 부조의 경우처럼 떠내는 작업을 구상하게 되었고 옛 한복에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노랑, 주황, 연두가 섞인 은은하고 조용한 색깔의 표현을 위해 닥종이, 색한지, 고서적의 낱장을 도입하는 한편, 앞서 수집한 물체들을 긴박감을 줄 수 있는 방향에서 떠내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석고로 떠낸 원형의 음각이 굳어져 완성되면 그 안에다 닥종이, 색한지와 고서 등 30여겹의 붙임질을 가하여 완성해 내는 절차가 이렇게 해서 반복되었다.

이처럼 얻어진 창호는 일체를 감추고 일부만을 보여 주는 은근함과 아쉬움의 여운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를테면 안동의 폐가에서 느꼈던 고독과 아쉬움, 여운과 공허가 잠시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창호의 자태를 통해서 여실하게 표출될 수 있었다. 특히 동창이 밝았느냐의 연작들에서처럼 멍석과 창문이 병합되고 꼴라지에 의한 방대한 느낌마저 표출됨으로서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이정표를 획한 것으로 보였다.

92년에서 95년에 이르는 과정은 제2기의 마감을 보다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전, 그러니까 90년대 초에 이미 등장했던 바이얼린의 이미지들이 거대한 멍석의 저 거치른 자태와 교묘하게 앙상블을 이루는 가운데 주옥같은 연작들이, 문자 그대로, 보아서 화려하리 만큼 극적인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종래의 부조적 표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닥지와 약간의 컬러를 배경으로 여러 개의 바이얼린들이 이리저리 겹치고 배열되는 자태는 물론, 멍석의 둥근 형태와의 교감, 질감의 차이와 미묘한 연속의 리듬과 함께 회화성을 풍부하게 간직하는 데 이르렀다. 작품 명제로 즐겨 붙인 Ensemble은 음악의 앙상블을 회화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은 듯한 감회를 갖게 하였다.

4

마지막 제3기를 획하기에 이른 요즘의 작업들은 이미 94년부터 서서히 도입하기 시작한 와당, , 아쟁, 해금, 비파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오고 있다. 색조는 흰색과 연푸른색이 덧칠되고 배면에서 새어나오는 원색들의 회화적 처리에 의해 명랑하고 경쾌한 운율마저 느끼게 한다.

이글을 마감하면서 근자에 도입해 온 일련의 악기들 중에서 바이얼린이 단연 그 시초를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 작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재음미함으로써 그의 작품 세계가 시종 끊임없는 차용과 융합을, 나아가서는 변용의 의지를 일구어 내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주목해 두고자 한다. 바이얼린은 음색은 물론이고 유려한 모양까지 가장 서양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중의 하나라 여겨진다. 나는 이같은 서양적 형태와 토속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점차 현대 문명에 밀려 이제는 아쉬움과 향수가 남아 있는 멍석을 즐겨 다루고 있다. 이를 무한한 변용성과 수용성이 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며 우리의 민족적 삶과 밀접한 닥종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이같이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서민적인 것과 귀족적인 것, 토속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들을 화면에 함께 배치시키고 대비시킴으로써 일상적인 것과 다른 전혀 새로운 미감을 맛보고 느끼게 하려는 데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1995.8. 화랑미술제 작가노트)

요컨대 박철의 일관된 시각이 이처럼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서로 상이한 가치들 간의 대비와 차이를 병합하고 또한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데 있다면 금후의 그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맥락을 견지하면서 앞서 열거한 일련의 사물들과 같은 부단히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들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자 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개인전은 바로 이러한 전망을 확실히 해 주게 될 것이다.

Allusion and Variation, or The Age of integration:
Park Chul’s Odyssey Toward Art

I

It is already some 25 years since Park Chul launched his career as artist in 1971. This year marks his 19th private show, the first of which began in 1978. During all this while, he has gone through three major phases of transformation. On the whole, the first epoch covers the period from 1976 through 1983, after which he comes upon a relative quietude for several years. Then again, in the second epoch, he makes a vigorous leap with the overseas exhibitions from 1989 till 1995. Now, as he admittedly says. Park faces another new dimension in his art, at which point the time seems to be ripe to make an overall evaluation of his journey up until now toward art.

II

In tracing Park‘s transformations so far, a certain major current is found throughout all his search that could be termed as <allusion and variation> or <integration> as in the title of this Introduction.
Instead of directly pouring out his heart or effusing the objects around himself, Park has been intent since the earliest attempt on carefully selecting the objects that can represent his true motive best, and then, on bringing harmony Into the selected objects for the ultimate metamorphosis Into new images. For him, the first epoch is characterized by differentiated use of materials each time, say, the indian ink and the Chinese drawing paper or monotone in the first solo exhibition in 1978, followed by the colored cotton cloth in the 2nd exhibition 4 years later and the frottage works done with the rough mulberry paper in the next year respectively.
Why Park chooses to work in this style in the earlier years can be interred from his own comment: "Through the raindrops spattered on me dust-dulled window pane, I’d like to give shape to the encounter between the past and the moment at present. (The Hanguk-ilbo. Oct. 8, 1983)“ As for me, writing an interpretation on his works at that time, I elucidated, "Fully conscious of the problem or how to imagize, he has been getting down to the experiments on the frottage method (introduction to the 2nd solo exhibition of Pork Chul)”
While referring to ‘frottage’ and ‘imagizing’, l was drawn by Park's idea at the ‘encounter’ between the days gone by and the moment in reality. In earlier days, Park used for this ‘encounter' such various acts and objects as tearing, making speckles, butterfly, squid, kite, leaves or trees, letters and windows. As seen in the serial works of <The sound> and <Window-Frottage> , he tried to leave as many traces as possible, piling up layers and layers of images.

lll

After the entry in the Sao Paolo Biennale in 1983 with his earlier efforts, he came to need some 4 years of quiescence. However, from 1989 till 1991, he again come to the attention with the main motifs of window frame and straw mat inserted in more serious and solid plane. After the attempt to embody the patterns of encounter through the image of raindrops on the window pane, this time he was bent on another experiment to ‘imagize’ the encounter through the window frame and the straw mat. Park himself recalls those days as follows:
“When i began lecturing at the Art Department of Andong National University in Kyungsang-buk-do in September 1985, I came upon a lucky break, which was wholly unexpected. Though I’ve recognized early enough that the housing type in Andong area has retained its conventional peculiarities intact, the days in Andong kindled in me a new aesthetic sensibility toward our own traditional beauty. As i was born and grew up in a remote rural village myself, i felt glad and even grateful to find again the archetype of our ancient housing with nothing changed much amid the whirlwind of modern civilization. It struck me almost miraculous. Then, a year later, when the construction of lnha dam near Andong area began, people had to leave their cheished homes and grounds of life because of the newly formed waterlogged areas caused by the construction. Having long kept special attachment to the old things of our people since my childhood, I began to gather together in the ruins the fragments of remnants. With my own heart broken, too, I collected the broken door frame, pieces of patterned tiles and roofing tiles, farming tools. horse saddles, straw mats and so on. (Art World. July, 1987)”

Thus he came to meet the window frame and the straw mat. They might be something destined in store for him to be met through the tragic circumstance of the flood-stricken areas, or rather something that he had long expected to find in the modern civilization. To him, the moment comes like this: “In the empty ruins of the deserted houses, I felt overwhelmed by the inevitable nothingness and transience of life. There l was faced with the fragments of reality severed from a certain continuity, with life‘s eternal sorrows ruthlessly revealed. Haunted by the loneliness, I felt everything so fleeting and in vain. (lbid.)"

Feeling an almost uncontrollable urge to incarnate the perpetuation at <encounter> , this time, he needed some means more powerful and intense than the ordinary planes at oil painting or drawing. For him, it was more to exude the thrills that filled up his whole soul. The result appeared as the serial works of <Ancient Fittings> and <Has the Day Broken through the East Window?> . There he began to strike out modelling as in relief or embossed carving. To enliven in the proper way the subtly exquisite and serene colors at yellow, orange and light green seen in Hanbok or the Korean traditional costume, he came to use the mulberry paper, colored Korean paper and the leaves at old books. The memo of plastering played the role of enhancing the necessary tension for the materials he collected Once the intaglio of the original object hardened, he stuck within it the mulberry paper, colored Korean paper and the leaves at old books which, after all, piled up thick with over 30 layers.
The work <Ancient Fittings> thus completed evoked such lingering tones or implicit, inward and hazy tailings, showing only a part, mysteriously encompassing all the rest. For instance. the feelings of solitude and something evanescent, and the echoes of nothingness were vividly captured through the embossing figures of the wooden lattice window that popped up in a flash and then submerged in particular, as in the serial works <Has the Day Broken Through the East window?> , the parallel combination or the snow mat and the window frame reverberated the feelings of immensity by the added touch of collage, showing a distinct landmark in his works,

For. Park, the years from 1992 through 1995 seem to have crowned the finale of the second epoch. There the appearance at violin succeeded in making a brilliant ensemble with the roughness of the large straw mat, displaying a feature almost dramatically gorgeous to the letter. The arrangement at several violins overlapped here and there under the background ot mulberry paper and some colors, the harmony made between these and the round form at the straw mat, their difference in textures and the delicate rhythms in continuity contributed to the rich ‘pictorial quality' graphically separated with the tarmer expression at relief kept intact. It seemed as if he had grafted the term ‘ensemble’ in music upon his own unique world of art.

IV

These days, upon his third epoch, he has been making another full-scale experiments on the motifs of patterned tile, reed screen and such Korean traditional instruments as A-jaeng, Hae-geum and Bi-pa (counterparts of the Western instruments such as fiddle and lute), Here both the overlapping of white and light blue, and pictorial handling of the primary colors under the background emanate an atmosphere of bright nimbleness. Park’s own account on why he employs the violin so frequently among lots of musical instruments explains well enough how he has tried to develop the methodology of allusion and integration. with the attempts for variation.

“To me, violin, in its tone color and elegant appearance, seems to be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things of the European aesthetics different from ours. Along with this Western product of beauty, I often match the straw mat which is our native product, though it has long been pushed out in modern life, I intend to express the longings and nostalgia for such forgotten things through the mulberry paper, for it represents our national ethos so excellently in its potentials for infinite variation and accommodation as well as with its misty and unpretentious colors By arranging in contrast the things Western and Korean, common and aristocratic, native and modern together in my plane, i try to elicit an aesthetic experience wholly different from that which are found in our daily life, (Aug. 1995, Seoul Arts Fair, Artist's Note)"

Whether Park's search will keep following the axis of time, making parallels and contrasts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and further, whether he will succeed in creating another new images with ultimate values are yet to be seen, however, to be sure, his exh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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