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박철, 전통적 형상들의 현대적 표출
Park Chul, peintre coréen_Épanchement moderne des formes traditionnelles
글: 문영훈, 시인
우리는 동시대의 가장 한국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인 박철 화백의 한지부조회화를 한국예술의 정신적 특질을 배경으로 삼아 살펴보고, 아울러 시적 영감을 주는 작품의 묘미에 때로는 창작시로 답하는 운문적 구성을 겸하여 가면서 그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우선 한국예술이 갖는 정신성의 원천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때는 고조선 시대, 제13대 천제인 흘달屹達의 재위 26년(기원전 1757년)에 현자 유위자有爲子는 우주의 이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우주란 무한하고 광대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니 또한 끝도 없이 영원한 시간이다. 원초적 기운으로 가득찬 이 공간은 멈추는 법 없이 보편적 운동을 야기하며 지속적으로 윤회의 모양을 만들어 낸다. 사람은 만물 가운데 으뜸이니라. 우주적 생명속에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사람은 가장 귀한 존재이니, 생각을 지니고 나왔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근본이 사람을 잉태하였으니 만약 사람이 태어나 근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살펴볼 수 있듯이, 하늘 땅 사람의 삼중적 관계_삼위일체는 이후 한국민족의 삶은 물론 예술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가치가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그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조화와 겸손이 묻어나는 형식의 전통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서울 유네스코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미국 출신 동양미술사학자인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bel은 한중일 세 나라의 예술적 특질을 알파벳 C로 시작되는 단어를 사용해 중국은 control-통제, 한국은 casual-편안한, 일본은 contrived-꾸며진, 이렇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도자기 제작에서 중국은 가마와 유약의 엄격한 통제로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고, 반면 한국은 자연스럽고 무심한 방식으로 도공의 기질을 드러내고, 일본은 가마에서 막 꺼내진 도기의 한쪽 귀퉁이를 구부리거나 깨트려 한국의 무심한 매력을 따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 초기, 저명한 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Soetsu Yanaki는 고려청자와 중국장식도자기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도자기들은 우리가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국도자기는 우리가 다가가든 다가가지 않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심결에 나오는, 그러한 한국의 고유한 감성으로 세계와 교감을 나누는 작가들을 우리는 오늘날에도 만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박철 화백이다.
근대 이후 동서양 문화의 활발한 교류나 상호적 영향으로 복잡한 문화적 흐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1970~80년대에 이르러 서구미술사조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요구되는, 한국미술의 독자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지작업이 유행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성이란 어떤 외부적인 요구나 시대적 양식의 모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도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논리적인 구조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어지는, 문득 찬란한 섬광처럼 솟아나는 직관이나 오랜 관조를 통해 이루는 깨달음을 통해 구현되는, 그야말로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철의 한지죽을 이용한 부조회화는 현상적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질서 내지는 시선의 오랜 관조를 필요로 하는, 존재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는 독특한 영역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은 흔히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무엇인가로 인해 마주하는 시선을 스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게 만드는, 매혹이 서려 있는 조형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회화를 “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정의했듯이, 그의 작품에는 보여도 보이지 않는 실체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작가활동 초기, “완벽한 드로잉”과 그림으로 대상의 “속심을 훔칠 줄 아는 인간적인 소묘술”로 그 진가를 인정받던 회화작업이 형태적 완성미라는 결과를 추구한 것이라면, 멍석, 떡살문양, 창호, 와당, 등의 토속적이고 순박한 소재들과 한지죽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이루어가는 부조작업은 사물과의 혼연일체를 이루며 진행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한, 정신적 성취감이 아닐까 싶다. 한지죽의 깊고 오랜 물성과 그 감촉을 다루는 작업과정 자체도 어느 순간 무심결이 되어버리겠지만, 작업 후의 물기가 마르면서 완성되어질 형태 또한 이제 작가의 손을 떠나 시간이라는 중립적인, 아니 작가의 의지를 떠난 무심결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시선을, 걸음을 들여놓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남게 된다.
따라서 부조작업을 마친 작가는 작품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관조의 시간으로 든다. 마치 정성스레 다기를 준비해 놓고 다도를 행하는 수행자가 향기롭게 우러난 차맛을 음미하며 명상에 들 듯이 말이다. 다도처럼, 그의 부조회화작업은 우주적 합일에 위해 이루어가는, 일종의 경건한 의식이다. 적절한 배합과 비율, 그리고 배치에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면, 작가는 신성한 작품에 바쳐져야 할 공물이 아니겠는가. 인고의 세월을 한지죽이라는, 애초에 형태를 거부하는 질료를 준비한 다음 나름대로의 현상적 세계를 간절하게 빚어 나가는 작가의 몸가짐은, 스스로 조물주라 칭하게 될 오만의 경지가 아니라, 조물주의 경지를 되짚어가는 겸손의 미학이다.
“나는 한지가 마를 때까지 자연 우연 고연을 기다린다.”
작가노트에서 말하듯 그는 기다린다. 작가 자신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조형적 사건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마도 오랫동안. 과연, 한지의 늪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된, 때로는 겨우 때로는 무던하게 모습을 갖춘 그의 조형적 세계가 드러난다. 박철 화백의 작품세계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질 중의 하나는, 아마도 고고학적인 매혹일 것이다.
“작품 저변에 흐르는 맥락은 하나의 인간적 흔적으로, 한국인의 혼이 스민 우리의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일어나는 상관적 관계의, 완전히 드러난 상태의 유혹이 아니다.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아직 채 드러나지도 않은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 유물과도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물음표와도 같다. 아니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따스하게 데워오는, 한국의 토속적 요소들로부터 시작한 작업은 더 나아가 서양의 바이올린 첼로 등을 포함하게 된다.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 서로 다른 성질의 대비가 어우러져 함께 조화를 이루는 한지부조의 세계는, 분별 이전의 새로운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 경이로운 세계의 거대한 크기 앞에서 연약한 존재의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고귀한 정신의 흔적들…
무수한 세월을 보내고 난 다음에 문득 마주하게 되는 유물처럼,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여 재료를 마련하고 재료와 한 몸이 되어 이루어가는 박철 화백의 조형작업은, 조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발굴에 가까운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드러난, 나란히 놓여진 현상의 흔적들은 같고 다름도 없는 본래의 순수한 세계를 되찾는다.
Ensemble 창호-5, 136,5x97cm, Pigments naturels sur papier coréen, Ancienne fenêtre, 2006
창문 너머,
사랑의 여운과도 같은
침묵의 서곡이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아래
사무치는 그리움이 되어
까닭모를 서러움이 되어
찾아오는
비와 바람과 눈보라에
전율하던 가슴이 남몰래
흐느끼던 시절,
소리는 소리를 부르며
향기는 향기를 부르며
텅 빈 곡조를 자꾸만 내었다
간곡히 당겨 놓은 선 위로
튕겨져 나오는 음향音香들이
참 곱게도 울었다
한 많은 삶의 뒤안길을
따스하게 적셔가듯이,
곱게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