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의 메르츠,
한지 위에 박제된 유물
박철의 일관된 신념은 ‘작품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등차를 두어 구별 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새롭게 변신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현대미술가들의 매재(medium)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새로운 재료에의 탐색과 발굴에 대한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표현의 주체로서의 매재에 첫 변용을 가한 입체파 화가들이나 다다이스트들, 특히 독일화가 쿠르트슈비터스가 자신의 제작법에 스스로 메르츠(merz)라는 명칭을 부여한 이후, 그것을 계승한듯한 정크 아트나 콤바인 아트, 또는 아상블라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실험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매재가 등장한 나머지 종래의 관행적인 고전적 표현재료를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으로까지 생각될 정도로 의식의 변용이 일상화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제까지 동양의 회화에 있어서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종이 매재에 현대미술가들의 관심이 기우러 지면서 페이퍼 워크니 페이퍼 스컬프쳐(종이조각)니 하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이것은 파피에 콜레와는 다른 개념이다.) 한국의 현대미술 동향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원로급에 속하는 권영우, 정창섭, 일본에서 활동한 제일 ‘모노파’ 작고화가 곽인식 등이 이 계열이며 박서보, 하종현 등도 잠시 종이를 활용한 적이 있다. 종이라는 매재가 단지 화포(캔버스)의 대안물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콜라지의 형태로 즉물성을 띄고 나타나기도 했거니와, 우연의 기법이 개입된 표현적 전환에 따라 의외성(意外性)이 강조된 측면이 많다. 평면으로 환원되는 ‘평면의 회화화’를 넘어서서 부분적인 입체화를 시도한 경우도 있었고, 일류전 방식을 취했거나 오브제의 실물 형상을 오버랩 또는 각인시켜 표출하는 방법도 시도되었다.
슈비터스의 메르츠빌트(merz-bild) 즉 메르츠의 그림의 개념을 박철의 작품에 적용시켜도 무방할 듯싶다. 슈비터스가 ‘메르츠’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는 아니었다. 각기의 글자를 허심하게 짝 맞추어 썼을 뿐이다.(다다이즘 자체가 허무를 표방하는 모임이었다) 박철 작품의 본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파피에콜레-콜라지를 거쳐 나타난 메르츠처럼 박철의 작품 태생도 선험자들의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박철은 캔버스나 유화물감을 외면한 대신 한지와 오브제를 선택했다. 그의 한지 작품이 다른 한지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었일까. 한지와 색채만의 조합에 의해 화면을 구성적으로 처리하는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주변의 사물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찍기의 기법을 써서 부분적으로 입체 윤곽을 재생시킨 것이다. 한지의 연질 흡착력은 입체에도 적중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박제된 사물은 평면에 투사된 이미지로 활력을 얻는다.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작품을 보더라도 작가는 이미 한지에 찍기 혹은 탁본을 구사한 작업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나타난 중첩된 이미지들은 사물의 단편적인 편린으로 떠오른다. 추상적인 화면에 구체적인 사물의 모티브로 처음에는 창틀과 빗물의 형상, 멍석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교차된다. 경북 지방의 대표적인 선비 고장 안동을 이웃한 점촌이 작가 박철의 출생지이다. 고색창연한 전통이 배어있는 고도(古都) 및 오지의 환경적 상황을 그는 체감적으로 수용하고 흡수했을 터이다. 유년시절부터 향리에서 겪은 옛것들에 대한 애정과 친밀감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진 제작 동인(動因)의 키 포인트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안동 근교의 댐건설로 수몰 직전에 있던 고옥 마을의 폐허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적인 것의 원형을 발견했다고 술회환 적이 있다. 폐허화된 텅 빈 고옥의 폐가에서 수집할 수 있었던 와당조각, 농기구, 멍석, 창틀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그것들로서 착안된 작품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 자체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시사하는 상징물로 환치될 수 있었다. 우리 전래의 닥종이와 전통 생활가구 내지 기물과의 이 뜻하지 않은 만남(융합)또한 의외성이다. 거기에는 한국적 서정성이라는 의미도 내포된다. 고옥 창틀이나 멍석, 맷방석 등은 이제는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것을 환기시키는 유물에 다름 아니다. 이것들은 비록 서민성정(庶民性情)이 배어있는 하잘 것 없는 민예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 조형적 짜임새는 정교하다. 여기에 작가는 한술 더 떠서 바이올린이라는 지극히 대비적인 이질적인 사물(서양악기)을 첨가하기 시작했다. 토속적인 멍석의 면밀한 이음새와 둔탁한 텍스추어, 그리고 한옥격자 창틀의 반복적인 기하학 구조가 실은 화면 공간의 패턴을 이룬다. 그 위에 한 모서리가 위로 두텁게 돌출한 바이올린의 날렵한 형상이 차츰 배면에 가라앉듯이 잠기며 중첩되어 전개된 화면은 이채롭다. 적조한 배면과 사물형상의 선율적인 동세가 정중동(靜中動)으로 합일된 통합적인 화면에 접착제 구실을 하는 전통 염료액을 부어 고착시킨다.(이 과정에서는 염색을 전공한 아내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닥종이와 우리 고유색의 염색 한지, 거기에 한문 고서의 낱장을 겹쳐 붙임질을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석고로 떠낸 사물(농기구 · 악기 · 탈 · 귀면와등)의 형상을 부조적으로 표출시켰다. 서민적인 멍석 위에 얹혀진(또는 안으로 잦아드는) 바이올린은 동방을 방문한 서양의 여왕처럼 고귀해 보인다. 그리고 대조적인 동서 앙상블을 형성하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아르망이 박철에게 친구가 될 것을 제의해 왔을법한 일이기도 하다. 아르망은 오랫동안 무수한 부서진 바이올린 잔해(殘骸)를 자신의 작품의 매재로 전용해 왔었다. 바이올린 외에도 우리의 전통 악기인 아쟁이나 해금, 비파까지 동원한걸 보면 작품에 무언의 ‘소리’를 수용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비교적 질서적으로 겹치게 배열된 바이올린의 작품에서 얻게 되는 음조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에서는 유려한 이상적인 격조를, 후자에서는 격렬한 동세(動勢)가 감지되는 바로크적인 긴장감을 떨치기 힘들다.
박철의 일관된 신념은 ‘작품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등차를 두어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새롭게 변신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198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출품을 필두로 몇 해외전에 출품하기도 했던 작가는 일시오리진 그룹에 몸담고 있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거의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운영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脫) 서구적인 아이덴티티를 신조로 하는 부단한 자기 탐구의 길을 걸어온 역정이 돋보이는 화가이기도 하다.
김인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