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이제 연필 . 물감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그리는’ 즉, ‘묘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캔버스를 칼로 찢는 행위의 결과만으로도 그림이 되고, 쓰레기를 주워다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된다.
박철의 경우처럼 부조(浮彫) 형식도 그림의 범주에 든다. 그림은 행위의 결과일 뿐이라고 확대해석해야 될 상황이다.
박철은 묘사적인 기법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형태를 보여준다. 명암에 의한 입체적인 표현효과가 눈속임에 불과하다면 그의 경우는 오히려 실제적이다. 입체물에 접근하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를 이용한 조형기법은 얼핏 보기에도 재료에 대한 숙지와 세련된 감각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이미 묘사적인 기법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형태를 절반쯤 드러낸 현악기의 이미지는 여체를 모방했음직한 우아한 곡선으로 리듬을 형성하면서 작가적인 의식의 투명성을 보여준다. 청색 바탕 위에 눈가루처럼 뿌려진 한지의 투명성은 그대로 그 자신의 의식의 잔상으로 이행한다.
드러남과 감추어짐의 절묘한 이중주라고나 할까. 무한공간에 유영하는 맑은 예술혼을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은하수에 흐르는 선율이 있다면 혹, 이런 이미지가 아닐까. 투명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현악기의 그 절묘한 ‘앙상블’을 조형언어로 전화(轉化)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리지’ 않고도 그림이 되는 비결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종이(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새로운 시각의 조형세계는 우리의 꿈과 상상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신 항 섭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