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파편

박철 0 515

기억의 파편

 

나는 시골 농촌에서 작은 정미소와 벼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가에서 6,25 동란 중에 태어나 폐허 속에 먹는 문제만이 가장 시급한 시기를 체험 하면서 자랐다. 다들 일년에 몇 달은 쌀이 없어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보리 고개를 보내는 등 궁핍한 생활이 일상화 되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 어려운 질곡의 시기가 나는 묘하게도 그립고 아름다운 청순한 기억들로 떠오르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적 서정이라는 독특한 우리만의 정서가 아닌가 한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기억들로 아련히 저장 되어 있으며 오늘날 첨단적 현대화에도 나의 작업에는 창작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기억되어 있는 것들 중 가장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들을 회상해 본다.

 

하루 해가 질 무렵 뚝방 길을 걸으며 저 멀리 어슴프레한 산아래 초가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올망 졸망한 집, 그 사이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오솔길, 고즈넉한 풍경들과 저 지평선 너머 누가살고 있을까 하는 신비감.

 

늦가을 밤 적막한 고요 속에 바람이 불면 마당에 뒹구는 낙엽소리.

 

겨울밤 마당 옆 감나무 밑에서 소피를 보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새로이 보여지는 앙상한 가지에 걸린 외롭고 처량한 초생달.

 

봄이오면 산과 들에는 화사한 봄꽃과 겨울 잠을 뚫고 솟아나는 파릇파릇한 어린잎들, 논과 밭에는 농부들과 순박한 소들이 농부들의 손에 이끌려 쟁기질하는 모습, 참(식사)을 머리에 이고 논뚝길을 가는 엄마의 모습.

 

추운 겨울이 오기전 집안 식구들은 오래된 창호를 새 창호지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이른 새벽 동이뜨면 방안 가득 화사하고 깨끗하고 탱탱한 창호지와 손잡이에 붙어 있는 몇가지의 빠알간 꽃잎들.

 

겨울밤 손전등을 켜고 초가집 짚더미 사이로 구멍난 곳을 비추어 팔을 넣어 참새 잡던 생각.

 

비가 오면 마당앞 오래된 무궁화는 우리네 조상을 닮아서인가 피고 지는 처량하고 서글프고 끈질긴 모습.

 

한적한 겨울날 농사일로 바쁘게 사용되던 멍석이 집 뒷전 벽에 척척 휘어져 걸려있는 처량하게 구부러진 모습.

 

함박눈이 오는날 나즈막한 언덕 위 작은 교회당은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를 연상하듯 꿈속의 풍경 등등등

 

지금도 잊을 수가 없으며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2020, 12,   작가 노트

 

 

 

박철 작가의 변 (Text)

 

한지는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숨 쉬는 종이, 숨쉬기 때문에 천 년을 가는 종이라고 한다. 물성 또한 가변적이며 수용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표면은 까칠하며 담백한 느낌을 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멍석은 일일이 사람의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멍석의 그 반복적 형태는 오늘의 현대미술이 보이고 있는 반복적 무념(無念) 행위와 흡사하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나는 한지가 마를 때까지 자연(自然), 우연(偶然), 고연(古然)을 기다린다.

 

- 작가 노트 중에서

 

 

서양의 현악기인 바이올린, 첼로와 우리의 토속적 재료인 멍석, 창호, 떡살 등을 사용하여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서민적인 것과 귀족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등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과 이들의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새로운 미감을 느끼고 이를 통해 생성과 소멸 이라는 필연의 법칙을 말하고자 한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나의 그림 속 바이올린의 모습은 다분히 귀족적이고 서양적이며 여성의 여체를 연상하는 곡선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동⋅서의 만남이 한 화면 속에서 훌륭한 앙상블(Ensemble)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작가 노트 중에서

 

 

화면의 물체들이 사라졌다 생겨나고 생겨났다 사라지는 여운을 화면에 남겨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과 어떠한 물질이든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퇴화되어 반드시 사라진다는 시간의 진리를 표현하였다.

- 작가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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